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메리카 연합국 (문단 편집) === 노예제와 '주의 권리' === 남부의 독립과 전쟁 명분은 '연방정부가 헌법에 명시한 주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북부 위주의 연방정부가 남부 주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하였다. 후대 [[컬럼비아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친남부 역사학자들은 남북전쟁의 발발 원인을 노예제 문제보다는 북부와 남부의 문화적 차이나 당시의 관세 문제[* [[산업혁명]]이 일어난 북부에선 보호무역을, 영국에 목화를 수출해야 할 남부에선 자유무역을 선호한 데에서 갈등이 발생했다는 주장.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의 후예인 [[인요한]]도 자신의 책에 이런 주장을 실은 바 있다. ], 연방정부와의 정치적 갈등 등에서 찾았다. 일부는 더 나아가 "남북 전쟁은 노예제를 두고 남부가 일으킨 반란이 아니라 각 주의 권리를 짓밟기 위해 북부 연방 정부가 시작한 전쟁이다"라는 극단적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은 노예제 문제와 남부의 명분 및 남북전쟁을 분리해서 보았다. 이들을 더닝 학파라 하는데, 20세기 초반에서 흑인 민권 운동의 부상까지 미국 내 보수주의와 우익 역사학을 주도한 [[컬럼비아 대학교]]의 윌리엄 아치볼드 더닝 교수를 필두로 한 학파이다. '''그러나 더닝 학파 등에서 주장하는, 노예제와 남북전쟁을 분리해서 보는 시각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논파되었다.''' 1950~70년대의 [[수정주의]] 논쟁을 겪으며 성장한 현대 남북전쟁 관련 학계는 이러한 시각을 전적으로 논파하고 더닝 학파의 주장을 완전히 폐기된 학설로 밀어넣으며 발전한 분야로, 에릭 포너, 케네스 스탬프, 유진 제노비즈 등 현대 남북전쟁 학계의 큰 골격을 만든 인물들은 대부분 이 더닝 학파의 주장을 논파하며 학자적 기반과 명성을 쌓았으며, 이들의 주장에 기본이 되는 건 다름아닌 19세기 중반 남부연합의 당사자들에게서 나온 1차 사료들이다. 단적인 예로 남부연합의 두 번째 국기인 결백기(The Stainless Banner)를 고안한 서배너 기반 데일리 모닝 뉴스(Daily Morning News) 사장이자 주 필진이었던 윌리엄 톰슨(William Tappan Thompson)이 밝힌 디자인 취지 원문을 읽어보자. >"As a national emblem, it is significant of our higher cause, the cause of a superior race, and a higher civilization contending against ignorance, infidelity, and barbarism. Another merit in the new flag is, that it bears no resemblance to the now infamous banner of the Yankee vandals." >---- >국가의 상징으로서 이 깃발은 무지, 불충, 미개함에 맞서 싸우는 더 우월한 인종, 더 고등한 문명의 숭고한 대의의 표지다. 이 깃발의 또 다른 장점은 이제 악명높은 그 양키 [[반달]]들의 깃발과 닮은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 >-데일리 모닝 뉴스, 1863년 5월 4일자 논평 >As a people, we are fighting to maintain the Heaven-ordained supremacy of the white man over the inferior or colored race; a white flag would thus be emblematical of our cause… Such a flag…would soon take rank among the proudest ensigns of the nations, and be hailed by the civilized world as THE WHITE MAN'S FLAG >---- >인민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열등하거나 유색인 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따라서 흰색 깃발은 우리의 대의를 상징하기에 적합하다...[* 톰슨 본인이 고안하고 채택 된 남부연합 두 번째 국기는 흰 바탕에 왼쪽 상단에 익히 유명한 안드레아 십자기가 들어간 형태였다.] 이 깃발은 곧 세계 만국의 자랑스러운 깃발 중에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이며, 백인의 깃발로서 문명화된 세계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 >-데일리 모닝 뉴스, 1863년 4월 23일자 논평 어구 하나하나에서 [[인종주의]]적인 내용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남부연합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 본인부터 패전 이후 전범으로 수감 중 현대 남부연합 옹호 세력처럼 은근슬쩍 전쟁 전에 그리 부르짖었던 인종주의적 주장은 중화하고, 자신들의 대의가 마치 헌법주의적 측면에서 주의 자치권을 위했던 것으로 포장했을 만큼 오래된 주장이다. 더닝 학파의 주장은 당시 [[흑인민권운동]]에 대한 역풍, 부상하고 있는 반공 우익 [[매카시즘]], 본격 제국주의 열강으로 등극한 미국의 자국 내 패권주의와 사회다윈주의적 시각을 혼합하여 전쟁 전 남부에 대한 일방적 미화를 기반으로 한 주장이다. 대중문화 같은 매체에 나오는 코드로 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국가의 탄생]]이 대표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북부 자본가가 무시무시한 양키 군대를 끌고 와서 목가적 낙원에서 우리끼리 잘살던 남부 농민들을 유린하니 마니 하는 내용들이 더닝 사관에 입각한 역사적 인식의 전형이고, 이렇기 때문에 저런 소위 남북전쟁 전후 재건기(Reconstruction) 시기 남부 낭만물이 20세기 초중반, 즉 흑인민권운동의 부상과 이에 따른 극우성향 백인들의 반발과 시기적으로 딱 맞물렸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터지고 남부가 연방정부의 공업력과 군사력에 의해 [[참교육]]당하기 이전 남부 주들의 분리와 독립을 주장했던 정치인들과 문필가들이 봤으면 인종주의적 측면을 빼려는 인간들을 두들겨 팼을 법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노예제 문제와 하등 관계 없었던 관세 문제로 터졌던 [[앤드루 잭슨]] 시절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연방법 무효화 사태]](Nullification Crisis)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측이 주의 자치권을 주장했을 때는 본인들 빼고 남부건 북부건 아무도 사우스캐롤라이나 측의 주장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고, 비슷하게 관세 문제로 촉발된 1812년 [[영미전쟁]] 당시 [[뉴잉글랜드]] 주들의 관세권 갈등에 비슷한 주장이 터졌을 때도 아무도 주의 권리 운운하며 동참하지 않았다. 오직 노예제의 문제가 결부되었을 때만 주의 자치권이란 주장이 남부 전역을 통틀어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남부연합의 설립자 본인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노예 소유주들이었다. >윌리엄 A. 잭슨은 남부연합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의 마부 노예였다. > >당시 남부의 노예주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마치 살아있는 가구처럼 여겨, 그들 앞에서도 마치 가구 앞에서처럼 백인 앞에서는 못 할 아무 이야기나 마구 늘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제퍼슨 데이비스도 그랬는데, 그는 특히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는 잭슨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남부연합군 사령부와 군 기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식한 니그로가 그런 거 들어서 어쩌겠냐고 생각했는지도 몰라도, 잭슨에게는 남부연합의 작전계획과 보급로에 대해 들을 좋은 귀와 날카로운 집중력, 달달 외울 암기력이 있었다. > >1862년 5월 3일, 천신만고 끝에 버지니아 프레데릭스버그 근처의 연방군 진영으로 탈출에 성공한 잭슨은 그동안 데이비스가 남부연합군 사령부와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 낱낱이 보고했다. > >남부연합군의 부대 배치와 보급로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는 것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밀이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부연방군의 어빙 맥도웰 소장이 에드윈 스탠턴 국방장관에게 즉시 전보로 그 내용을 보고했으며 "제퍼슨 데이비스의 마부가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결과적으로 북군이 패하긴 했지만, 1862년 중반의 <반도 전역> 작전에 잭슨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 >1년 후,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조차도 "적군에게 우리의 정보를 빼돌린 주요 정보원들은 흑인들 중에 있었다." 고 한탄했다. > >윌리엄 잭슨은 교수형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를 위해 북군에 협조했던 수백 명의 흑인 첩보원들 - "Black Dispatches" 중 한 사람이었다. > >안타깝게도, 그는 대단한 공적을 세우고도 "니그로"이기에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져왔으며,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 >- 마조리 간(Marjorie Gann) & 재닛 윌렌(Janet Willen) 저,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Five Thousand Years of Slavery) 그렇게 인종차별주의에 뼛속까지 물든 작자들이었기에, 현대적이고 정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아주 심각하게 멍청한 짓들도 종종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남부연합 고위층들은 흑인을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나 가구로 생각했기에 "어차피 가축이나 가구 같은 것들인데 걔들이 사람 말을 알아듣겠어? ㅋ" 라는 생각으로 흑인들 눈앞에서 태연하게 민감한 기밀사항들을 주절대는 짓을 굉장히 자주 저질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기밀들을 들은 도망친 흑인 노예들은 이렇게 듣게 된 기밀들을 고스란히 연방정부 측에 넘겨주면서 남부의 패배에 일조했다. [[http://www.cnn.com/2009/US/02/20/spy.slaves|Slave in Jefferson Davis' home gave Union key secrets]] 물론 남부인들도 모두, 특히 지식인 계층에선 상당수가 노예 제도에 찬성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이것은 단순히 노예제도가 아니라 주가 가진 자치권의 문제다."라는 선전이 의미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 심각한 자기모순이었는데, "만일 각 주들이 연방정부에 속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면, 그들은 남부연합 정부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경계주들 가운데는 "노예제 유지에 찬성하지만 남부연합에 가입하지는 않겠다."는 중립주들이 생겨났는데, 이에 대한 남부연합의 응답은 외교적 회유나 경제적 고립같은 정상적 방법이 아닌 군사력을 동원한 침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침공은 빠르게 주 방위군과 북군의 역공에 저지되었고 불필요한 전략 물자의 소비로 귀결되었다. 2015년까지만 하더라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정부 건물에 위치한 남부연합 기념비 위에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었고, [[조지아 주]]는 구형 남부연합기에 문장을, [[미시시피]] 주는 아예 좌상단에 [[:파일:구 미시시피 주기.svg|남부연합기가 대놓고 들어간 주기]]를 1894년에 채택된 이후로 2020년까지도 썼다. 미국, 특히 남부 주에서 남부연합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은 널리 퍼져 있었고 어물쩍 넘어갈 만큼 광범위했던 건 사실이다. 이러한 전후의 수정주의적 관점이 남부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고, 북부로부터도 상당한 이해 및 동정을 얻기도 했다. 북부 및 연방정부의 입장에서도 남부 주들이 연방에 잔류하게 된 이상 그들을 괜히 자극하기보다는 적당히 자존심을 살려 주면서 다시 연방에 반기를 들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고, ‘Lost cause’는 전쟁을 선과 또 다른 선의 대결로 포장하여 남부의 민심을 달래는 데 제격이었다. 물론 이를 통한 남부와 북부의 갈등 완화는 백인들에게 한정된 것으로, 남부 흑인들의 인권이 전쟁 직후보다도 더 악화되는 것을 그 대가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